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루터 (문단 편집) === 가톨릭 === 1520년의 교황 교서에서는 루터를 '하느님의 포도밭을 파헤치고 다니는 야생 멧돼지'에 비유했으며, 19세기 시인이자 [[예수회]] 사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는 『독일의 난파{{{-2 The Wreck of the Deutschland}}}』에서 루터를 폐목재 짐승(beast of the waste wood)에 빗대었다. 요하네스 얀센은 "중세 후기 교회는 당시 성서 번역 작업과 종교예술의 만개, 경건한 서적의 출판 등으로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면서 "루터의 결정적인 오류는 이러한 자원들이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데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루터는 교회의 전통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며 중세 문화를 파괴했다고 정도로 비판한다. 다만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루터 개인의 평가는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루터의 신학에 대해서 주로 비판적인 연구가 진행했고, 루터, 루터파 신학에 대한 평가는 16세기와 종교분쟁 시절 같은 극단적인 반응은 아니다. 20세기 신학 연구들의 성과로 마르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으며, 1965년 미국 가톨릭계 정기 출판물에선 이렇게 평가 했다.["The Charm of Melody," ''Priest'' 12 (July 1965):585.] >우리는 오늘날 어제의 편협한 용어로 루터를 비난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마르틴 루터란 인물도 예외 없이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톨릭 인사들은 루터 개인과 루터주의를 구분하고 있으며, 일단 가톨릭 교리에 맞서서 루터의 교리 자체는 옳지 않지만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에 자극을 주었고 가톨릭교회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위대하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거대하다고는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루터를 읽어 볼 것을 권하는 가톨릭 사제와 신학자들은 있다. 개신교의 주장에 맞서서 가톨릭교회 역시 교리와 논리를 정비하여 치열한 반박으로 교회 신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자들은 루터의 인용이 많고 그러기 위해선 많이 읽을 수밖에 없다. 온건한 평가를 내린 다른 신학자론 조셉 로츠가 있는데, 그는 루터가 토마스주의보다는 오컴주의 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세 후반 기성 교회 안에 만연한 부패현상을 가톨릭 정통 신앙과 동일시한 것에서 비극이 생겼다면서 "루터가 주장한 대로 과연 중세 교회가 그렇게 타락한 요소를 교회의 본질로 삼고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개신교에서는 오컴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인정한다. 루터 본인도 [[오컴의 윌리엄|오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루터의 신학은 오컴주의와 완전히 같지 않다. 루터의 오컴의 유명론의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영향으로, 초기 받아들인 오컴주의까지 비판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루터 평가 또한 전향적으로 변화했다. 현대에 스위스 출신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루터의 파문 해제와 공적을 인정해달라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한스 큉은 국교회 제도와 갈리아주의를 '어용 신학'이라고 말할 정도로{{{-2 (큉, 『교회란 무엇인가?』)}}} 국교회스러운 형태를 매우 싫어하였다. 교황무류성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큉이 개신교로 전향한 것은 아니다. 특히 관주도적 종교개혁에 의한 개신교 국교회 시스템{{{-2 (독일권 및 북유럽의 루터교, 영국 성공회, 제네바 개혁교회 등)}}}은 큉의 교회론에선 '어용 신학'이었다.]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 개신교내 여러 교단들과 대화에 나서 특히 1999년 루터교회와 [[의인(구원론)|의인]](義認)[* Justification. 흔히 가톨릭에서는 '의화'로, 개신교에서는 '칭의'로 번역한다. 엄밀히 말하면 의인 역시도 개신교에서 선호하는 번역어이지만, 가톨릭에서도 간혹 쓰는 번역어(예: 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한국어판)이므로, 그나마 중립에 가깝다고 보고 이를 택했다.] 교리에 대해 상당한 합의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듯 현재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함께 세속화와 탈종교화 흐름에 공동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가톨릭 수뇌부에서도 생각보다 루터에 대한 평가가 적대감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가톨릭교회가 루터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며,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넘어간다. 루터 당시에는 400년 이상 이어질 분열이 기정사실이 아니었으며, 가톨릭의 [[에라스뮈스]], 가예타노(Gaetano) 추기경,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멜란히톤(Melanchiton) 등 온건파는 얼마든지 있었고, 심지어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는 이러한 온건파들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가 강경함과 가톨릭의 너무나 늦은 대응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렇게 화해적인 자세는 재일치를 위한 좋은 토대처럼 보였다. 황제 자신도 비타협적인 교황주의자는 아니고, 그의 마음의 밑바탕에는 에라스뮈스적인 뜻에서의 개방적인 인문주의자였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구 신앙인과 신 신앙인 신학자들로 2개의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의 대변인은 멜란히톤과 에크였다. 가톨릭에서는 에크·파베르·코흘레우스에 의하여 완성되고, 8월 3일에 낭독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반박서」가 심의의 기초로 결정되었다. 협의에서 양측은 서로 양보하였다.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모든 참가자들에게서 생동하고 있었다. 즉, 누구보다도 황제가 변호하고 있던 표어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치를, 타협하겠다는 최대한의 각오, 자신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결국 5가지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 [[사제]]의 결혼, [[수도자|수도서약]], 그동안 프로테스탄트 영주들로부터 약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 [[미사]]의 희생적 성격 미사 전문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이었다. > >처음 4가지 논점은 교회의 규율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논점만이 신앙과 관계된 것이었다. 가톨릭에서 양보의 용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황제가 1530년 9월 14일 캄페조 교황사절에게 위에서 지적한 마지막 논점들도 프로테스탄트에게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과 함께 대리를 파견한 사실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교황사절은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보낸 로마에서는 기대를 걸었다. 교황 글레멘스는 당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가예티노 추기경에게 조언을 청하였다. 추기경은 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것이 다만 규율의 문제이고 신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결정은 앞으로의 공의회에서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문제는 그때부터 공개토론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멜란히톤은 만약 적어도 이 두 논점에서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 2가지의 양보를 로마로부터 얻어내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1563년에 가서야 그것들을 다룰 시간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적어도 평신도의 성혈 배령은 허용되었으나 때는 이미 30년이 늦은 후였다.''' > >1530년 아욱스부르크에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때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정신은 멜란히톤과 에라스뮈스의 정신이었고, 루터의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파문된 자로서 제국의회에 참석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코부르크 요새로부터 토의 과정을 대단히 정확하게 지켜보았고, 계속된 서신교환으로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멜란히톤의 양보에 대하여 그는 신랄한 비난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떠한 대화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8월 26일 아욱스부르크로 작센 선제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 >- August Franzen·Remigius Bämer·Roland Fröhlich. 2001. 《세계 교회사》.[* 원제: 《Kleine Kirchengeschichte》(2000년판)]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몬시뇰]]) 옮김. 왜관:[[분도출판사]]. 312-313쪽 또한 《Kleine Kirchengeschichte》는 루터가 가톨릭 교리를 자주 왜곡하여 이해하여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는 중세 가톨릭의 구조적인 미흡함도 한 몫을 하는데, 중세 가톨릭은 교통·통신·행정력의 문제 때문에 근대의 가톨릭보다는 신학적인 명료함이 부족했다. 이는 각 지역 신학자들의 자율성을 높여준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통념과는 달리 중세 가톨릭은 신학자들의 자율성이 후대의 가톨릭보다 높았다. 오히려 19세기 가톨릭 신학자인 聖 존 헨리 뉴먼은, 근대의 가톨릭 신학이 중세 가톨릭 신학의 자율성을 잃은 것을 한탄하였다. 중세에도 당연히 신학자에 대한 이단 논쟁이 있었지만 근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이단자를 처벌할 행정력이 부족했으며, 더군다나 스콜라식 논리학은 '이단자'와 '이단 명제'를 구분했기에 이단 논쟁에 연루된 신학자라도 "내 발언을 A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건 오해이다. 당신이 A라는 의미로 이해하겠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 내 발언을 철회하겠다."라는 논리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21세기에 "네가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는 한에서는 내 발언을 취소하겠다"라고 하면 그건 싸우자는 소리지만, 스콜라학에서는 이게 통했다. 이 경우 A는 '이단 명제'로서 배척되지만 논쟁에 연루된 신학자는 '이단자'가 아니게 된다.] 훗날 루터(그리고 개신교)와의 논쟁에서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실제보다 과장되고 프레임화되고 슬로건화되는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단순화와 프레임화는 오늘날에도 양측에서 계속되고 있다.{{{-2 (예: "너희는 행위 구원론"/"너희는 실천 없는 죽은 믿음")}}} 그러나 가령 의인(義認)론만 하더라도, 양측의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미묘하다. 의인론은 기본적으로 사도 바울로가 주장한 것이고, 은총으로 의인된다는 것도 매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관점이다. 과연 루터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온전히 잘 이해했냐고 말하면 가톨릭으로서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아무튼 간에 가톨릭 신자가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외치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공로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그건 분명히 가톨릭 신앙에 부합한다. 또한 가톨릭은 하느님 앞에서의 엄밀한 의미의 인간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가톨릭]] 문서 참고. 특히 가톨릭과 루터교의 의화 공동 선언은 꼭 참고할 것.] >루터의 가톨릭적인 모습은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4516&keyword=&gubun=01|데니플레]]의 저술{{{-2 (1904~1909)}}}과 [[https://de.wikipedia.org/wiki/Hartmann_Grisar|그리사르]]의 저술{{{-2 (1921~1930)}}}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불쾌한 논쟁은 이 종교개혁가를 그의 시대와 그의 의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중세 후기 교회의 불쾌한 상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던 그가 지녔던 관심사의 정당성과 함께 그의 개혁 의도의 순수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신도 사실은 교회 안에서 현저하게 시작한 개혁 의지의 하나의 대표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원기왕성하게 출현한 그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를 거슬러 종교개혁가가 된 것, 바로 그것이 비극이다.''' > >루터가 1517년에 테첼의 대사{{{-2 大赦}}} 거래를 반대하였을 때, 그는 교회의 순수한 가르침의 대변자로서 거룩한 것들을 정말로 부끄러운 방법으로 거래하고 있는 남영을 반대하는 것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미니코회]]원과의 대결은 신학적 학설의 대립으로 빛을 잃어버렸다. 루터의 유명론적·오컴주의적 견지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테첼이 대표한 토마스주의적인 후기 스콜라학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교회의 교도직에 의하여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비로소 그 불확실성들을 제거하였다. 그동안은 그 문제들이 학파에서 자유롭게 토의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테첼이 자신의 의견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주장하고, 재판관처럼 루터의 대답을 도발시켰다. '''루터의 대답은 그 자신의 전 기질에 상응하게 역시 일방적이고 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학파의 논쟁에서 근본원리적인 대결이 생겨났는데, 그때 토마스주의적 입장이 순수하게만 가르쳐졌더라면 그 입장이 더 우세하였을 것이라고 우리는 오늘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만일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신학이 더 명확하였더라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루터의 공격 중에서 많은 것이 무용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사{{{-2 大赦}}}문제만이 아니고 몇 개의 핵심문제만 들더라도 의화론, 미사와 성사에 대한 이해, 교회, 특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가르침 같은 데에서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호성에 대해서는, 그 주요 책임이 유명론적인 신학에 있다. 루터는 그 안에서 자라고, 그것으로 생활하고, 그 신봉자임을 엄숙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올바른 토마스주의적 스콜라학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 자신은 모든 것을 유명론적인 입장으로 봄으로써, 실제로는 전혀 가톨릭적이 아니고 유명론적이었던 많은 것이 그에게는 가톨릭 교리로 보였다. [[섀도 복싱|이렇게 그는 여러 가지로, 실제로는 가톨리시즘이 아닌 것을 자신 안에서 격투하여 쓰러뜨렸다]].{{{-2 (Lortz)}}}.[* 참고 ''Joseph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2 Bde. Freiburg ^^6^^1982; ''Joseph Lortz'', Martin Luther, Grundzüge seiner geistigen Struktur, in: Reformata Reformanda, Festschrift f. H. Jedin, hrsg. von E. Iserloh u. K. Repgen, I, Münster 1965, 214~246] '''나아가 그는 가톨릭 교리를 자주 크게 왜곡하여 서술함으로써, 그 불명료성을 확대하는 데 현저하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객관적인 비판은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종교개혁 본래의 비극적인 근거가 있다. 그것이 루터의 신학적인 자세와 그의 개성과 강하게 결합되었다.''' >---- >- August Franzen·Remigius Bämer·Roland Fröhlich. 2001. 같은 책 293-294쪽. >루터의 위기에 특히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여 전개·발전시킨 예정론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해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기 전의 초기 스콜라 신학과 중기 스콜라 신학의 할레스의 알렉산더와 [[보나벤투라]]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의 학파에게, 그리고 {{{-2 (크게 밀려나긴 했으나)}}} 중세 말엽에도, 소홀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연속성은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은총론에서도, 루터 자신이 의식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점은 루터를 종교개혁으로 내몬 결정적 계기가 된 로마서 1장 17절[* 발췌자 주석: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공동번역)]이, 그 앞에서는 어떤 죄인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의{{{-2 義}}}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거저 선사하시는 의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루터가 생각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주장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학자들이 뚜렷이 밝혀준 바와 같이[* (책 속 주석) H.Denifle, ''Die abendländischen Schriftausleger bis Luther über Justitia Dei (R 1,17) und Justificatio'', Mainz 1905.], 중세 신학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 >[[한스 큉]]{{{-2 ''Hans Küng''}}},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2 ''Das Christentum: Wesen und Geschichte''}}},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2, pp.659-66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